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수헤일 알 하산 (문단 편집) ==== 2018년 ==== * '''아부 앗 두후르 공항 탈환작전 (2017년 12월 ~ 2018년 2월)''' : IS 격멸을 위한 라벤다 작전의 성공에 힘입어 시리아 군 최고 사령부는 이들리브 주의, 지금은 반군에게 넘어간 군사 공항인 아부 앗 두후르 공항의 탈환을 위한 작전을 하달하였다. 작전 계획은 아부 앗 두후르 공항 기준으로 남쪽의 타이거 부대, 북쪽의 공화국수비대 제4기갑사단, 동쪽의 리와 알 쿠드스 민병대와 이란 혁명수비대를 핵심으로 하여 3방향에서 논밭 지대를 주파하여 아부 앗 두후르 공항을 점령하는 것으로, 총사령부의 작전 완료 예상 기간은 2018년 중순으로 예정되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4기갑사단과 리와 알 쿠드스의 진격은 잠깐 교전이 벌어지고는 주저앉는 상황이었고, 서쪽의 NDF(향토방위대)도 다르지 않았다. 오직 남쪽의 타이거 부대만이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2017년 12월 27일부터 격화되기 시작한 전투는 2018년 1월 3일 전선을 돌파하기 시작하면서 점령지가 급속하게 확대되었고, 1월 5일까지 러시아의 반군 보급로에 대한 후방항공차단과 더불어 쾌진격을 거듭하였다. 이에 다급해진 타흐리르 알 샴은 분쟁 관계에 있던 여러 이슬람 반군에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1월 6일 자살폭탄차량을 이용한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하여 정부군으로부터 여러 마을을 탈환했다고 발표했으나, 1월 7일에는 타이거 부대에 역관광을 당하면서 오히려 더 점령지를 빼앗기고 공세가 돈좌되었다. [[http://pds21.egloos.com/pds/201801/09/02/c0063102_5a543ccb43e6d.jpg|1월 1일 ~ 1월 7일까지 전황도]]. 심지어 1월 8일에는 목표였던 아부 앗 두후르 군사공항까지 11km를 남겨두었고, 1월 9일에는 '''무려 3km를 남겨두어 총사령부의 작전 목표를 5개월이나 앞당기는 쾌거'''를 이룩했다. [[http://zairai.egloos.com/5902755|진행 상황을 나타낸 글]]. 이렇게 되자 아부 앗 두후르 공항 동쪽의 이란 혁명수비대, 리와 알 쿠드스가 진격을 개시하여 반군을 포위망 안에 가두기 시작했다. [[http://pds21.egloos.com/pds/201801/11/02/c0063102_5a573d5ec7304.png|전황도]]. 한편 타이거 부대의 예상을 뛰어넘는 진격속도에 후방이 비면서 급히 병력이 증원되었다. 한편 반군의 나와바리인 이들리브 상실에 위기감을 느낀 투르키스탄 이슬람당을 비롯한 이슬람 반군들은 병력을 차출하여 타흐리르 알 샴의 작전 지휘를 받을 것을 결의하고, 1월 11일 정부군의 측면을 찔러 반격을 개시했다. [[https://youtu.be/QeYGLOm6vS0|전황 동영상]], [[https://youtu.be/xI7zUAmDux8|전투 영상]]. 터키로부터 장비를 지원받은 반군은 1월 14일까지 강공을 가하여 후와인 알 카비르, 움 할라킬과 같은 소도시를 장악하고 정부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으며, 반군측 리포터가 해설하는 도중 러시아의 폭탄이 뒤에 꽂혔으나 불발되는 등 강력한 격전이 이뤄졌다. 타이거 부대는 아부 앗 두후르 공항 점령을 보류하고 병력을 재배치하며 이에 대응을 시작했으나, 16일까지 격렬하게 이뤄지던 반군의 반격은 갑자기 사그라들었다. 정체는 1월 19일부터 이뤄진 터키군의 시리아 이프린 주의 쿠르드족 격멸작전 "올리브 가지"를 위해 이슬람 반군들에게 소집령이 떨어졌기 때문에 반격에 참여하던 이슬람 반군들이 전열을 이탈해버렸기 때문이었다. 반격의 기세를 올리던 타흐리를 알 샴은 순식간에 공세가 돈좌되었고, 반격을 위해 병력을 모조리 빼어 무주공산이 된 아부 앗 두후르 동부와 북부를 향해 4기갑과 이란 혁명수비대가 이미 1월 11일부터 공세를 가하기 시작했으며 순식간에 점령지를 확대하였다. 이를 틈타 이들리브 IS 잔당이 점령지를 확대하기 시작했으며, 1월 16일 정부군의 후방을 공격하여 주요 소도시인 신자르(Sinjar)를 점령했다고 발표하기까지 했으나, 정부측은 즉시 사진 자료를 발표하여 이를 부정하였다. 1월 20일에는 아부 앗 두후르 공항 남서쪽에 돌입하였고, 타흐리르 알 샴은 독자적으로나마 처절한 반격을 계속했지만 결국 타이거 부대에게 격퇴, 아부 앗 두후르 공항 서쪽에 있는 아부 앗 두후르 시가지도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29일 타이거 부대에게 완전히 넘어갔다. 타이거 소장은 이 승세를 이어 이들리브 시 북동쪽의 시아파 마을로 2015년 이래 포위되어 온 카파리야-후아 마을로 진격하여 이곳을 해방시킬 것을 천명하였으나, 같은 날인 1월 29일 터키군이 타흐리르 알 샴의 호위를 받아 알레포 주 하이데르(Hader) 시 전방의 알 에이스(al-Eis)에 진주하고 시리아군에 포격을 가해 러시아와 시리아 공군이 공습을 단행해였다. [[https://youtu.be/BrtoSsWcHRo|터키군 진주 영상]]. 터키군은 다시 후퇴했으나, 이 사건은 터키군이 이프린 침공 작전 "올리브 가지"에 참여하는 반군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이들리브 주로의 정부군의 진격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상징이자, 반군을 직접적으로 보호하겠다는 것을 나타내는 사건이었다. 여기에 타흐리르 알 샴은 터키의 지원을 받는 대신 용병화된 아흐라르 알 샴이나 투르키스탄 이슬람당 등의 이슬람 반군을 비난하는 입장에 있었으나, 결국 조직의 보전을 위해 터키의 지원을 수용하게 되었다는 입장 변화를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했다.[* 알 누스라 전선 시절부터의 사령관인 아부 무함마드 알 줄라니는 그 자신이 이라크 알 카에다 생활을 오래 해왔음에도 시리아 토종 단체인 알 누스라가 알 카에다에 충성을 맹세했다는 이유만으로 경원시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다른 반군들이 터키나 미국의 지원을 받는데 가장 뛰어난 전투력을 갖춘 자신들이 지원에서 밀려난다는 것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알 카에다 물을 빼고 토종 이슬람 반군으로 이미지 변신을 꾀하고, 내부 알 카에다 세력들을 설득하여 이뤄낸 것이 2016년 7월 알 카에다 탈퇴 및 파타 알 샴 전선으로의 단체명 변경이었다. 하지만 이 노력에도 불구하고 알 카에다 색채를 빼지 못했으며, 2017년 1월 이들리브 이슬람 반군 간의 헤게모니 쟁탈전 때 아이러니하게도 알 카에다 정체성 때문에 아흐라르 알 샴을 비롯한 여러 이슬람 반군에서 인재들이 몰려오기도 했다. 하지만 2017년 1차 하마 전역 이후 계속된 패배 끝에 결국 타 반군과의 화해를 방해한다는 이유로 친 알 카에다 인사를 체포했으나, 내부 반발이 너무 심해서 도로 석방하였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 알 카에다 계열은 타흐리르 알 샴을 탈퇴하고 자이쉬 알 바디야, 준드 알 말라힘이라는 단체를 따로 만들었으며, 이들은 알 카에다로부터 시리아 공식 지부로 인정받았다. 타흐리르 알 샴은 이런 좌충우돌 끝에 터키와의 협력을 비로소 가능케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http://zairai.egloos.com/5903868|당시 상황 요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이거 소장은 터키군이 진주하지 않은 알 에이스 남쪽의 아부 앗 두후르 근방에서 카파리야-후아 마을을 향해 공세를 개시했으나, 2월 3일 러시아군의 [[Su-25]] 지상공격기가 반군의 휴대용 대공미사일에 격추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타이거 소장은 공세를 중단했으며, 터키와 러시아간의 막후 협상이 개시되었다.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2월 4일부터 후방 포위망에 남아있던 이들리브 IS를 향해 공격을 개시, 정부군 병력이 IS를 향해 재배치된 틈을 타 터키의 올리브 가지 작전을 이탈(...)한 반군이 2월 6일부터 타흐리르 알 샴과 협력하여 타이거소장이 점령한 지역을 재탈환하며 반격을 개시했으나, 마을 몇 개를 빼앗는 선에서 중지되었다. 한편 알 에이스에서 철수했던 터키군은 [[https://youtu.be/AtqR5YnYNlk|2월 6일 재진주]], 과거 시리아군 최대 헬기장이었던 아피스 군사공항을 터키군 사령부로 전용할 것임을 발표하며 이들리브 반군을 노골적으로 보호할 것임을 드러냈다. 2월 9일에는 아부 앗 두후르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텔 투르콴(Tell Turqan)에 터키군이 진주, 감시소를 실치함으로써 타이거 부대가 카파리야-후아 마을로 진출할 루트를 봉쇄했다. 한편 타이거 부대는 2월 8일에 이들리브 IS를 거의 끝장내기 직전까지 갔으나([[http://iswnews.com/media/2018/02/1000km2-liberated-8feb18-19ba96.jpg|전황도]]) 2월 9일 IS와 협상을 통해 반군 지역으로 다시 보내버렸다(...) 반군은 크게 반발하여 이들리브 IS를 공격했고, 2월 13일 결국 이들리브 IS는 반군에게 항복하고 소멸하였다. 여기에 2월 14일, 다시 반군의 주요 도시인 마라트 알 누만(Maraat al-Nurman)과 그곳으로 이어지는 수르만(Surman)에도 터키군이 진주, 감시소를 설치하였다. 이로써 타이거 부대와 시리아 정부군은 6월달까지 걸릴 것으로 예상했던 아부 앗 두후르 점령과 주변지대 평정을 5개월이나 앞당긴 2월 초에 완수하는 군사적 대성공을 보여주었다. 이에 따라 하마-알레포 철도망을 되찾았으며,[* 하지만 반군이 철로를 죄다 뜯어서 터키에 고철로 팔아버리는 바람에 당장 열차 수송이 재개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더 이상 머나먼 카나세르로 삥 돌아서 알레포로 물자를 보낼 필요가 없이 훨씬 가까운 하마-알레포 국도를 통해 알레포로 물자 수송이 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터키군이 시리아의 주권을 무시하고 이들리브에 직접 진주하고 감시소를 설치하며 반정부군을 보호함에 따라 이들리브로의 군사적 공격은 시리아군 단독으로는 불가능하게 되었으며, 강대국간의 외교전에 바톤을 넘길 수밖에 없게 되었다. [[http://iswnews.com/media/2018/02/13-NW-Syria-9feb18-20bah96.jpg|최종 전황도]][* 2월 9일자 지도이기는 하나 최후 전황과 차이가 없다.]. 이로 인해 타이거 소장은 다음 작전이 수도 정예인 공화국수비대가 4년동안 고생했음에도 격퇴시키지 못한 수도 다마스쿠스 동부 고타 지역에서 이뤄질 것을 예고하며 이들리브 전선을 떠났다. ---- * '''[[다마스쿠스 강|다마스쿠스 강철]] 작전 (2018년 2월 ~ 4월)''' : 수도 다마스쿠스 동쪽 교외지역인 동부 고타(Eastern Ghouta) 지역은 4년동안 반정부군에게 장악되어 있었다. 2012년 [[사우디아라비아|사우디]], [[카타르]]의 지원을 받는 이슬람 반군은 동년 7월 수도 다마스쿠스를 몰아치며 시리아 정부를 위기로 몰아넣었으나, 정예부대인 제3, 4기갑사단을 투입하여 반군을 완전히 몰아냈다. 수도 반군은 시내에서 밀려나 교외 위성도시인 조바르, 하라스타, 자말카, 이르빈, 도우마로 밀려났으나 정부군도 더 이상의 전진을 하지 못하고 진퇴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에 2013년 3월 반군의 진격이 공세 종말점에 달한 틈을 타 전역에서 대대적인 정부군의 반격이 벌어졌으며, 동부 고타 지역의 반군은 퇴로를 완전히 차단당하고 고립되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강동구와 구리, 하남, 남양주가 반군 손에 들어있어 서울 전역이 야포 사정거리에 들어있는 것인 데다 수도의 보급을 책임지는 M5 고속도로가 기관총 사거리 내에 있었기 때문에 정부군은 2013년 이후 반군을 격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고, 특히 요새화된 조바르 지역이 주요 목표가 되었다. [[https://youtu.be/S4GkgW1X314|관련 다큐]]. 2015년에는 [[https://youtu.be/u388Jo86Pus|아사드 대통령이 직접 전선에 나와 조바르 지역의 정부군을 격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수많은 작전에도 불구하고 동부 고타의 반군을 격퇴할 수 없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병력이 부족하여 완전한 포위가 이뤄진 상태가 아니었고, 따라서 보급물자가 암암리에 반입되었다. 또 공격 작전을 수행해도 단위 제대에서만 독자적으로 수행되었을 뿐, 전 전선의 부대를 통합 지휘해서 이뤄진 적이 없었다. 그래서 공세가 이뤄져도 동부 고타 내의 반군이 병력을 집중시켜서 막아내기만 하면 공세를 장기간 지속하지 못하고 돈좌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또 정부군의 장점은 항공기와 중포병을 이한 강한 화력인데, 전쟁이 2013년을 넘기면서 자체적으로 보유한 탄약과 장비, 특히 항공기 창정비 기지가 반군에게 넘어간 이후 정비를 받지 못해 점점 가용 기체가 줄어들어 [[통 폭탄]]이나 코끼리 로켓 같은 저성능 급조 무기에 의지하면서 화력이 크게 나을 것이 없게 되었다. 2015년 초 이들리브에서 타이거 대령과 정부군이 대패를 당하면서 병력이 크게 부족해지자 동부 고타 내의 사우디 스폰을 받는 원리주의 반군 "자이쉬 알 이슬람"이 M5 고속도로 통제 및 콸라문 산의 정부군 기지를 정복하는 작전을 결행하고, 정부군이 이걸 막아내는 데 실패하면서 시리아 정부는 기밀 자료가 넘어가고 수도 보급이 통제되어 본격적으로 멸망의 위기에 빠졌으며([[https://youtu.be/hO_kZvGnjY8|관련 다큐]])[* 자이쉬 알 이슬람의 작전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 이들리브에서 5000명의 병력을 잃고 IS에게 돈줄인 유전지대를 모조리 빼앗기고 탄약 재고량도 한계를 보이면서 정부는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 절망적인 상황은 러시아의 참전으로 비로소 해소된다. 자이쉬 알 이슬람의 선전은 정부의 위기에 잘 편승한 것이 크다.] 러시아의 참전으로 겨우 위기를 넘겼지만, 그 후에도 상술한 근본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아 동부 고타를 압박하지는 못했다. 2017년 5월 다마스쿠스 외곽의 알 카분, 바르자 지역에서 정부군이 승리하고 점령하면서 여세를 몰아 조바르, 아인 타르마에 대한 공세를 8월까지 무려 3개월간 진행했지만 같은 이유로 또 돈좌(...)되기도 했다. [[https://youtu.be/Y5PyYziuZRs|관련 다큐]]. 하지만 이들리브에서 대승을 거둔 타이거 소장이 동부 고타로 내려오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수헤일 알 하산 소장은 동부 고타를 책임지기에 앞서 기존의 분산된 지휘체계 대신 자신에게 전권을 위임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타이거 부대를 비롯 제4기갑사단, 시리아 해병대, 리와 알 쿠드스를 비롯한 대규모의 병력이 동부 고타에 집결했고, 러시아 항공우주군이 전적인 지원을 약속하면서 상술한 정부군의 문제점이 전부 해결되어버렸다. 마침내 2월 18일부터 반군 거점과 시가지에 대한 포격과 공습이 시작되었고,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2016년 알레포 때와 마찬가지로 UN과 서방 언론은 동부 고타에서 대규모의 민간인 학살이 벌어지고 있다며 러시아와 시리아 정부를 전방위적으로 압박하기 시작했고, 러시아도 하루 5시간 휴전 등의 자구책을 내놓았으나 결국 전혀 지켜지지 않은 채로 공습 포격이 지속되었다. 한편 서방측에서 동부 고타의 반군을 억울한 민간인으로 선전하자 그에 반발하여 동부 고타에 있는 4개 반군([[알 카에다|타흐리르 알 샴]], [[무슬림 형제단|아흐라르 알 샴]], 파일라크 알 라흐만, [[와하비즘|자이쉬 알 이슬람]])이 이슬람 원리주의 반군이며 알라위파 시민들을 철창에 가두고 인간방패로 쓰거나, 자기들끼리 내전을 벌여 서로 죽여대고 시민에게 총격을 가한 것을 폭로하는 [[https://youtu.be/4LrudTW6cRw|영상]]이 나오기도 했다. 마침내 2월 26일부터 지상전이 개시되었다. 관찰자들의 예상대로 정부군이 실패를 거듭한 서부 시가지 지역이 아니라 기동전이 가능한 동부의 농업지대에서 개시되었으며, 2월 28일 타이거 부대가 고타 포위망 서남쪽의 소도시 알 나사비야의 도로를 차단하며 가장 먼저 방어선을 돌파하였다. 또 다른 주공인 하와쉬 알 나스리에서 개시된 공화국수비대의 공격은 2대의 전차를 방기하며 실패로 돌아갔으며, 반군 조직 "자이쉬 알 이슬람"이 이 전차 중 1대를 노획하기도 했다. 한편 전 전선에서 조공이 개시되어 고타 반군들이 병력을 한 곳으로 집중하지 못하도록 견제하기도 했다. [[https://pbs.twimg.com/media/DXHFdF6XUAA9MVN.jpg:large|2월 28일 전황도]]. 타이거 부대는 공화국수비대가 공세에 실패한 하와쉬 알 나스리로 이동하여 자이쉬 알 이슬람이 자랑하는 방어선 "죽음의 선"을 3월 1일 돌파했으며, 죽음의 선 너머로 돌진하여 하와쉬 알 다와라 마을과 구 방공대대 기지를 점령하였다. 뒤이어 해가 지자 야간 작전을 통해 풍부한 야시장비로 기습을 감행, 3월 3일에는 육군274대대 기지를 완전 장악하였다. 육군 274대대 기지는 반군 조직 자이쉬 알 이슬람이 2015년 군사 퍼레이드를 진행한 곳이기도 한 만큼 막대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남서부의 고립된 소도시 알 나사비야로 이어지는 모든 도로가 차단되었고, 보급이 불가능해지자 반군은 3월 3일 알 나사비야에서 후퇴, 알 나사비야와 요충지인 우타야, 연결 도로는 정부군이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http://iswnews.com/media/2018/03/14-East-Ghutah-3mar18-12esf96.jpg|3월 3일 전황도]], [[http://iswnews.com/media/2018/03/15-East-Ghutah-3mar18-12esf96-dddd.jpg|3월 4일 전황도]]. 반군은 긴급 회의를 거듭하며 하라스타 지역의 반군을 동원, 여러 차례 반격을 가했으나 모두 격퇴되었다. 2차 반격에서 반군은 유구한 전술인 터널 폭파 전술을 사용하였는데, 요새화된 건물 아래로 땅굴을 파서 일거에 점화, 건물을 무너뜨리고 방어선을 돌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타이거 소장이 터널 폭파가 의심되는 건물에서 병력을 철수시켰고, 터널 폭파와 함께 땅굴에서 지상으로 튀어나온 반군이 방어선을 돌파했으나, 이미 4기갑사단에 포격 좌표 지정이 완료되었고 반군은 5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며 반격이 돈좌되기도 했다. 이 반격의 실패 끝에 정부군은 서남쪽에서는 바이트 나임, 서쪽에서는 소도시 알 사호니야를 점령하고, 타이거부대는 하라스타 시가지를 향해 길게 뻗어나온 형태로 진격했다. 반군은 반격 역량을 대부분 상실하고, 하라스타 전선의 정부군도 방어를 뚫고 차츰 진격하기 시작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3월 7일에는 고타의 소도시 함무리예에서, 3월 8일에는 함무리예 남쪽의 소도시 사크바에서 정부군이 염소가스를 사용했다는 주장을 했고,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마크롱]]과 [[미국]]의 [[도날드 트럼프|트럼프]] 대통령이 시리아 정부군을 공격할 수 있다는 경고를 했으나, 실제 움직임은 없이 경고에 그쳤다. 3월 9일에는 하와쉬 앗샤리와 주변 농장지대가 넘어갔고([[http://iswnews.com/media/2018/03/18-East-Ghutah-8mar18-17esf96-hawsh-ashari.jpg|전황도]]), 마침내 3월 11일에는 정부군이 하라스타 지역의 마을 미스라바를 점령하면서([[http://iswnews.com/media/2018/03/19-East-Ghutah-10mar18-19esf96-Misraba.jpg|전황도]], [[https://youtu.be/B-ylrvpmmgI|전투 영상]]) 결국 하라스타 육군차량기지와 연결에 성공, 동부 고타 전역이 2개로 쪼개지고 말았으며,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하라스타 북쪽의 알 비루니 대학병원과 육군보급창에서 출발한 공화국수비대가 시가지를 교묘하게 피해 농장지대를 돌파하면서 동부 고타는 3조각으로 쪼개지게 되었다. [[http://iswnews.com/media/2018/03/21-East-Ghutah-12mar18-21esf96-aftris.jpg|3월 12일 전황도]]. 한편 미스라바 근방에서 자이쉬 알 이슬람이 사우디에서 수입한 설비를 갖춘 독가스 제조 공장을 운영한 것이 들통나면서 함무리예, 사크바 독가스 논란이 새로운 전기를 맞을 가능성이 생겼다. [[https://threadreaderapp.com/thread/973661866395361280.html|출처]]. 이와는 별개로 동부 고타 내부의 주요 반군 조직인 자이쉬 알 이슬람, 파일라크 알 라흐만, 아흐라르 알 샴, 타흐리르 알 샴은 정부군과 항복 협상을 진행 중이며, 자이쉬 알 이슬람은 남쪽 다라 지방으로, 다른 반군들은 이들리브로 떠나는 조건을 달고 있다. 전역 총지휘관인 타이거 소장은 800여 명의 정부군 포로를 무사히 돌려보내야 하며 그들이 사살된다면 협상을 중지하고 모조리 제압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또 반군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하라스타의 시민들이 정부군 지지 시위를 하면서, 반군이 빨리 이 지역에서 떠날 것을 요구하자 반군 조직 파일라크 알 라흐만이 시민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1명이 사망했고, 정부군이 지정한 인도적 탈출 통로인 알 와흐딘 캠프로 탈출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처음에는 정부군이 자신들을 학대하고 교도소로 보낼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 밝혀지고 전선이 도시 근처로 밀리면서 탈출량이 급증한 것. [[https://youtu.be/otCfJ3aeNdQ|3월 19일 아사드 대통령이 직접 전선을 방문]]하여 장병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결국 파일라크 알 라흐만과 아흐라르 알 샴, 타흐리르 알 샴은 전투 역량을 완전히 잃고 3월 23일 정부군에 하라스타와 이르빈 등을 넘겼으며, 버스를 타고 이들리브 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마의 자이쉬 알 이슬람과의 협상이 난항을 겪었는데, 자신들이 벌어들인 900만 달러의 군자금을 그대로 인정하고 자신들을 도우마 시에서 특권을 가진 경찰로 활동하게 해달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와 함께 내부적으로는 협상 찬성파와 반대파가 서로를 비난하다가 결국 찬성파가 4월 1일 협상 반대파인 총무 아부 알리 아이다라(Abu ali Idara)와 재무지도자 아부 오마르 말리야(abu Omar Maliyah)를 암살하면서 협상이 급진전되어 일부 병력이 버스를 타고 터키 국경지대에 위치한 도시 자라불루스로 이동하였으나, 4월 7일 갑작스레 다시 자이쉬 알 이슬람이 협상을 파토내면서 타이거 부대가 전면 공격을 개시했고, 이틀만인 4월 9일 자이쉬 알 이슬람이 전면 항복하면서 사태가 종결되었다. 한편 4월 7일 시리아 정부군이 독가스 공습을 가했다는 주장이 시민 소방조직 "[[화이트 헬멧]]"에 의해 주장되었고, 중독 증세로 실려온 환자들의 모습도 공개되었다. 이에 서방 국가들은 강도 높은 비난을 하며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영국]], [[프랑스]]와 합작하여 4월 14일 화학무기 연구/저장시설이라고 주장하는 바르제 과학연구소 등을 순항미사일 105발로 공습, 초토화시켰다. 그러나 시리아 정부측은 결백을 주장하며 화학무기 금지기구(OPCW)를 즉시 초청했으며, 화학무기 연구 생산을 한다는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8/04/15/0200000000AKR20180415060400108.HTML?from=search|바르제 과학연구소는 2017년 2차례에 걸쳐 OPCW가 강도 높은 조사를 통해 결백을 입증한 것]] 등이 밝혀졌고, [[http://m.news.naver.com/read.nhn?oid=002&aid=0002056199&sid1=104|더 가디언 지나 원 아메리칸 뉴스 네트워크 기자의 탐사보도]]를 통해 당시 독가스가 아니라 지하터널에 대피해 있던 시민들에 먼지구름이 닥쳐와 호흡곤란에 빠진 것이라는 현지 증언이 공개되면서, 트럼프의 공습은 질 나쁜 해프닝임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러시아는 미국측이 공군기지를 목표로 103발의 미사일을 쏘았고, 그 중 71발을 시리아 정부군이 요격했으며 러시아가 훈련을 잘 시켜준 덕이라고 자화자찬했고, 미국은 이에 처음부터 공군기지를 노린 적은 없었으며, 화학무기 시설에 전탄 명중했다고 주장하는 촌극이 연출되기도 했다. 타이거 소장이 지휘한 이 전투를 통해 4기갑사단이 몇 년 동안 노력해도 제압할 수 없었던 수도권의 강대한 반군 지역이 소멸되었으며, 수도 다마스쿠스의 물자 보급을 책임지는 M5 고속도로는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다. 또 6년간 전쟁터가 되면서 폐허가 된 수도권 동부 지역을 재건할 수 있게 되었다. 한때 도마의 자이쉬 알 이슬람이 M5 고속도로를 차단하고 정권의 숨통을 위협한 것을 돌아보면, 그야말로 정부를 살린 또 다른 전환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http://iswnews.com/media/2018/04/29-East-Ghutah-14ap18-25far97.jpg|4월 14일자 최종 전황도]]. 전역 종결 이후 타이거 부대는 4기갑사단과 헤어져 자이쉬 알 이슬람의 잔당이 있던 두마이르(Dumayr) 시와 동부 콸라문 지역에 전개했으나, 협상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이쉬 알 이슬람 잔당이 전면 항복을 결정하면서 4월 17일부터 정부군에 40여대의 전차를 비롯해 미국제 [[BGM-71 TOW|TOW]]와 통신장비 등을 넘기고 버스를 타고 자라불루스로 철수하였다. 교전 없이 승리한 타이거 부대는 휴식을 취한 후 홈스 북부의 반군 포위망을 격멸하기 위해 이동하였다. ---- * '''현무암 작전 (2018년 6월 ~ 2018년 8월)''' : 타이거 부대는 다마스쿠스 강철 작전 종결 후 두마이르 시와 동부 콸라문에 전개한 자이쉬 알 이슬람 잔당 격멸을 준비했으나, 협상 결과 반군이 모든 중장비를 넘기고 이들리브로 떠났다. 다시 북상하여 홈스 북부의 반군을 격퇴하기 위해 이동했으나, 러시아가 중재한 협상 끝에 다시 반군들도 알 라스탄 지역을 넘기고 이들리브로 철수했다. 이로써 하마 시까지 M5 고속도로가 내전 이후 처음으로 완전 개통을 완료할 수 있었다. 한편 5월 내내 수도 다마스쿠스 남쪽의 야르무크 난민캠프를 장악한 IS와의 격전 끝에 4기갑사단도 작전을 완료함으로써 수도 주변이 완전히 정부군의 손에 떨어졌다. 이런 대성공과 많은 부대가 전투에 투입될 수 있게 된 점에 힘입어, 시리아 총참모부는 시리아 민주화 사태의 계기가 되었던 남부 다라 주의 반군을 격멸하기 위한 작전에 착수했으며, 작전명은 '현무암 작전(Operation Basalt)'로 결정되었다. 다라 주의 반군은 요르단 유목민 계열 아랍인으로 다마스쿠스 지역과는 남남이었고 지역적인 유대감이 매우 강했으며, [[요르단]]과 [[이스라엘]]의 지원을 받아 정부군의 공세를 계속해서 막아내었으며, 정부군은 M5 고속도로 주변과 다라 시 북쪽만 겨우 장악하고 있었다. 이는 정부군의 가용 병력 자체가 부족했던 것도 원인이었다. 5월달부터 정부군의 검증된 [[http://zairai.egloos.com/5908191|정예부대와 민병대가 집결]]하였고 반군에게 6월 15일까지 기한을 통보, 협상을 제안했으나 반군이 이를 거부하고 결사 항전을 주장하면서 6월 19일 전투가 개시되었다. M5 고속도로를 중심으로 서쪽은 4기갑사단이 담당하고 동쪽의 돌출부, 이른바 라잣 분지는 타이거 부대가 담당했다. [[http://pds21.egloos.com/pds/201805/30/02/c0063102_5b0d9290cc3b8.jpg|작전 계획]]은 1차로 라잣 분지의 반군을 소멸시키고, 2차로 다라 시 측면으로 기동하여 시 외곽을 장악하여 포위한 다음, 3차로 다라 시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타이거 부대는 19일 당일 하란 공군기지에서 출발해 라잣 돌출부의 허리가 되는 주요 거점 무사이카 마을을 공격하여 점령하였고, 라잣 돌출부의 반군은 반격을 개시해 무사이카 마을을 재탈환했다. 하지만 타이거 부대의 파상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25일 타이거 부대와 제5기계화사단이 후방의 요충지인 [[http://zairai.egloos.com/5909642|부스라 알 하리리를 점령]]하자 포위섬멸을 우려해 대대적으로 퇴각을 개시했다. [[http://pds21.egloos.com/pds/201806/29/02/c0063102_5b34ff583e006.jpg|6월 26일 전황도]]. 결국 1단계는 겨우 7일만에 완료되었다. [[http://pds27.egloos.com/pds/201806/29/02/c0063102_5b34fe3709316.jpg|6월 28일 전황도]]. 타이거 부대가 여세를 몰아 알 알마, 알 수라, 알 하락 3개의 소도시까지 점령하여 반군의 방어선이 전면 붕괴되면서 상상도 못한 사태가 벌어졌다. 다라 주 동남부의 7개 소도시가 '''[[http://pds21.egloos.com/pds/201806/30/02/c0063102_5b367b39b15db.png|일제히 아사드 지지 시위를 벌이며 반군에게 나가라고 요구]]'''하기 시작했으며, 반군 장악 지역 중 가장 동쪽에 있던 소도시 부스라 알 샴을 거점으로 삼고 있던 쿠왓 알 샤바브 알 순나라는 반군이 러시아와 항복 협상을 시작한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자 다라 주 동남부의 반군은 더 이상 방어가 불가능하게 되었고 협상 의사를 표명했다. [[http://pds21.egloos.com/pds/201807/03/02/c0063102_5b3b71de263bd.jpg|6월 30일 전황도]]. 한편 M5 고속도로 서쪽의 4기갑사단 담당 구역에서도 몇몇 도시가 항복 의사를 발표하면서 알 타파스 시내로 진입했다가 협상 반대파들이 공격하면서 장군 두 명이 사망하는 큰 피해를 입었고, 남부전선 반군들이 협상을 철회하면서 정부군에 대항했으나, 타이거 부대가 다시 공격을 시작하여 7월 5일에는 알 사이다의 레이더 기지를 재점령하는 등 방어가 불가능함을 보이자 결국 7월 7일자로 모두 포기하고 정부군 통제 하에 항복했으며, 다라 주 동남부 전역은 현무암 작전 원안에서는 생각도 안했던 대성공을 거두며 요르단 국경 지대를 내전 후 처음으로 되찾는 대 성공을 이룩했다. 이후 타이거 부대는 요르단 국경을 따라 기동전을 개시하고, 4기갑사단과 공화국수비대가 다라 시 서쪽의 구 방공기지를 장악하면서 7월 9일 ISIS 칼리드 빈 왈리드 군대의 점령 지역을 제외한 요르단 국경지역을 순식간에 통제하에 놓는 기염을 토했다. [[http://pds21.egloos.com/pds/201807/10/02/c0063102_5b444b6bb965f.jpg|7월 9일 전황도]]. 이와 함께 다라 시내는 완전히 포위되었다. 동남부의 반군이 정부군을 소모시키며 방어를 해줘야 했는데, 협상에 참여하고 항복하면서 전선이 완전히 뚫려버려 타이거 부대의 기동전을 막아낼 방법이 없었기 때문. 결국 7월 12일 포위된 다라 시내의 반군은 '''완전 항복'''하고 러시아 헌병대와 시리아 정부군이 다라 시내에 진입하면서 '''다라 시는 6년간의 저항도 허망하게 [[http://zairai.egloos.com/5910391|손쉽게 함락]]'''되고 말았다. 이로써 심한 소모전이 벌어질 줄 알았던 현무암 작전의 2단계 시 외곽 포위, 3단계 다라 시내 점령은 '''겨우 사흘'''만에 이렇다 할 시가전 없이 끝나버리고 말았다. 4기갑사단도 배신한 알 타파스 시내에서 반군을 축출하고 점령했고, 남부전선 반군의 잔당들은 이렇게 쉽게 항복해버린 반군들을 비난하며 한때 원수였던 ISIS 칼리드 빈 왈리드 군대에 도시를 바치고 충성을 맹세하는 그룹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렇게 남은 반군들은 결사 항전을 맹세하며 전열을 가다듬었으나... [[http://pds21.egloos.com/pds/201807/20/02/c0063102_5b5184874bf76.jpg|7월 13일 전황도]]. '''시민들이 또 정부군에 항복'''하고 말았다. 정부군이 방어선을 돌파하고 도시로 진입할 것 같이 되자 중요한 거점이었던 카프르 나스지, 아크라바, 알 하라, 니메르, 자심 5개 도시의 시민들이 정부 지지 시위를 벌이며 반군에게 나가달라고 요청한 것. [[http://pds26.egloos.com/pds/201807/20/02/c0063102_5b51836a028b7.jpg|7월 16일 전황도]].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다라-쿠네이트라 주의 남부전선 반군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정부군과 협상을 벌여 이들리브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일부 반군은 IS에게 도시를 넘기고 충성을 맹세하거나 이스라엘 국경으로 탈출하려고 했지만, 이스라엘군이 국경을 봉쇄하고 민간구호단체 [[화이트 헬멧]]만 입국을 허용하면서 무기를 자체적으로 파괴시키기도 했다. [[http://zairai.egloos.com/5910688|관련 포스팅]]. 이렇게 되자 남은 것은 타실 시가지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보한 ISIS 칼리드 빈 왈리드 군대 뿐이었으나, 이들도 7월 26일자로 [[http://pds27.egloos.com/pds/201807/27/02/c0063102_5b5b17973060f.png|전선이 붕괴]]되고([[https://youtu.be/KUD5tX50zkQ|관련 다큐]]) 7월 30일에는 마을 3개밖에 남지 않았다가 결국 정부군에 항복, 버스 타고 동부 사막으로 떠나기로 하면서 현무암 작전은 8월 1일자로 당초의 작전 목표를 훨씬 뛰어넘는 '''남부전선 완전 평정의 대업을 이룩하며 종결'''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